베테랑 정진영이 타협 없이 찾아나선 '사라진 시간'

[노컷 인터뷰] 영화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스포일러 주의

그날 밤, 모든 것이 변한다. 시골 마을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고로 외지인 부부가 사망한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구(조진웅)는 마을 사람들의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단서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날, 마을 사람들 사이에 껴 술을 마신 형구는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잃은 건 전날 밤의 기억만이 아니다. '나'도 잃어버렸다.

형구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충격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집도, 가족도, 직업도 모두 사라졌다. 내가 알던 나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전부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말하는 내가 정말 '나'인 걸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게 정말 '나'인 걸까.

이때부터 내가 규정하는 나와 타인이 규정하는 나 사이에서 계속 충돌이 벌어진다. 이는 다시 형구의 안에서 슬픔과 혼란,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뒤엉켜 충돌하게 만든다. 33년차 베테랑 배우가 만든 첫 영화 '사라진 시간'은 이런 영화다.

정진영 감독은 "이 영화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살아가면서 계속하는 질문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충돌, 그리고 그 슬픔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영화 개봉 전인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정진영이 아닌 감독 정진영을 만났다. 그가 말하는 '사라진 시간'은 어떤 영화인지 들어봤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감독'이란 낯선 이름으로 돌아온 정진영, 낯선 영화를 내놓다

33년 동안 배우로서 관객에게 익숙한 정진영이 카메라 밖에서 인물들을 그려내는 '감독'으로 돌아왔다. '배우'라는 이름이 친근한 정진영이 아직은 낯선 감독의 이름으로 내놓은 첫 작품이 '사라진 시간'이다.

지난 18일 개봉한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를 마무리하고 관객에게 내놓기 전 그 과정을 떠올려보니 정 감독은 "덩어리로 다가온다. 하나하나 갈래도 특별히 나뉘지 않고 덩어리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영화가 개봉한 후 관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익숙한 장르 영화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데서 오는 낯설음과 불친절함 때문이다. 영화는 그저 형구라는 한 인물을 따라 자유롭게 그 안을 누비면 된다.

"'사라진 시간'은 갑자기 전개해야 영화가 흘러가지, 설명을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영화 전체가 앞부터 뒤까지 어느 순간 따라가면 확확 변화하는 상황을 따라오게 하고 싶었어요. 반 발짝 정도 뒤에서 맨 처음은 의심하며 쭉 가다 보면 이야기가 확 달아가는 거죠. 그러다 다시 반 발짝 뒤에서 또 따라오고. 그런 식으로 가고자 했죠. 그게 아마 관객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야기에 몸을 실으면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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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것만 따라가"…의심 없이 따라가야 하는 '사라진 시간'

극 중 형구의 아내 지현(신동미)은 형구에게 "소설 쓰지 말고, 보이는 것만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 이후 형구에게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가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말 '보이는 것만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실 영화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절대 따라가 지지 않아요. 의심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실패한 거죠. 보는 순간에는 의심 없이 따라가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 무언가를 의심하려는 순간 영화를 뒤쫓는 게 버거워질 수 있다. 애초에 '사라진 시간'은 모든 것을 풀어내려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 해답과 결말을 풀어내려 한다며 오프닝과 엔딩은 다소 버겁게 다가올 수 있다.

"남들이 규정하는 나로 더 많이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 그런 것들이었던 거 같아요. 이 영화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조금 황당하지만 자유롭고 재밌게 가면서 결국 마지막 골로 가고 싶었죠. 맨 처음 갑자기 시작해서 갑자기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그 안에서는 여러 가지로 바꿔가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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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이 규정하는 나, 그런 현실에 타협하는 데서 오는 슬픔

그의 말마따나 영화는 오프닝이 곧 엔딩이 된다. 둘의 차이라면 오프닝이 흑백이었다면, 엔딩은 컬러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 형구가 단 한마디를 남기고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서 결국 형구는 그런 운명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구나 하는 걸 발견하죠. 그걸 발견했을 때의 자기를 위안할 수 있는 뭘 하나 찾은 겁니다. 그래서 '참 좋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죠. 전 다른 엔딩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어쩌면 엔딩이 주는 당혹스러움조차 형구가 하루아침에 자신이 사라진 세계를 마주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든다. 형구를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온 관객들이라면 그의 혼란과 슬픔의 끄트머리나마 느꼈을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답을 안 주고 끝나는 영화죠. 그래서 이영(차수연)에게 왜 그런 병이 생겼을까, 형구는 왜 갑자기 변했을까 등의 질문을 안 해요. 이 이야기는 형구가 왜 변했을까를 묻는 게 아니거든요. 형구는 어떤 부부에게 닥친 불행을 수사하러 와요. 수사하는 척하다가 자기가 휘말려서 삶이 바뀌죠. 왜 내가 바뀌었는지 찾는 척하다가 바로 타협하고 항복하고 적응하는 이야기죠. 그 슬픔과 외로움을 그린 게 '사라진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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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뭘까?'란 질문을 극장 밖으로 가져갈 수 있기를

애초에 어떤 답이 있는 영화도 아니었고, 형구조차 어떤 뚜렷한 목표나 방향을 향해 나아간 인물이 아니다. 그저 잃어버린 자신의 흔적을 뒤쫓고, 다시 혼란스러워하고, 타인이 규정한 '형구'의 삶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다. 그런 형구를 뒤쫓던 관객은 영화가 마지막으로 형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후부터 영화를 거슬러 올라가며 생각하고, 곱씹고, 하나씩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마지막에 결국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렇구나 하는 아이러니한 안도감을 느끼며 끝나죠. 더할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관객분들이 어떻게 볼지는 또 다른 문제인데, 저로서는 이 이야기를 다 한 거고 그 뒤를 안 드렸기 때문에 관객분들은 '이게 뭔 이야기지?' '형구는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질문을 계속할 거 같아요. 극장에서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죠. 질문을 가져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감독이 질문의 답을 알려준 것도, 정해놓은 것도 아닌 데다 질문 자체가 쉽지 않은지라 영화를 본 그 자리에서 질문에 관한 어떤 답 내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극장 밖으로, 나의 삶 어딘가로 가져가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이다. 영화가 건넨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 관객을 뒤쫓게 된다. 그게 영화를 본 후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질문을 가져가셔서 나름의 답을, 결국 어느 순간 형구가 사라지고 '나는 뭐지?' '나라는 존재는 뭔가'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만들었어요. 찝찝함이 있기를 바랐죠. 선입견 없이 계속 변모해가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의심하지 않고 같이 따라가다 보면 '사라진 시간'을 보다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